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그린 <최 서방>에서는 지주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생활의 궁핍을 견디다 못해 결국 고향을 등지고 마는 농민의 참상을 형상화하였다. <인두지두> 역시 소작지를 빼앗기고 먹고살려고 탄광으로 갔다가 사고를 당해 하체가 절단된 창오가 또다시 생존의 굴레를 위해 잘린 하체 위로 ‘거미탈’을 뒤집어써야만 하는 하층민의 고통과 좌절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작품들에서는 현실에 적극성을 취하기보다는 인생을 관조하며 예술화를 시도하였다.
계용묵의 대표작 <백치 아다다>는 돈에 의해 왜곡되는 인간 심리를 파헤친 작품으로 벙어리 아다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물욕에 물든 사회의 불합리를 지적하면서, 불구적 조건과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비극적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난당하는 여성을 형상화하였다. 이런 소설 구조는 <마부>에서도 똑같이 보이는데, 반반한 얼굴 때문에 아내가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홀아비 응팔이가 새장가를 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 번 돈을 가로채는 초시를 통해 식민 자본주의가 확산된 1930년대를 배경으로 ‘돈’을 물신화하는 세태에 깊이 침윤된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였다.
<캉가루의 조상이>에서는 신체적 불구자의 내면적 순수함에 애정을 느끼고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일종의 문명비판을 시도하기도 했고, 특히 자신이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억울한 사연을 선생님께 쓰는 편지형식으로 된 <준광인전>에서 보여주는 거짓 뉴스의 피해는 그 당시도 현시대와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저자 : 계용묵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이 파산돼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 뒤 조선일보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잡지 <대조>를 발행하였고, 1948년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창립하기도 하였으나, 1925년 5월 <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相換>으로 등단한 이래 대체로 성실한 작가생활을 했다.
사실성과 낭만성을 아우른 예술 지상주의적 작품을 쓴 그는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의 작품집 등을 남겼으며, 1961년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